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외동딸 덕혜옹주(1912.5.25~1989.4.21). 일본인과 강제 결혼, 조발성치매, 이혼등의 비극을 겪으며 순탄치 않은 세상을 살다 간 덕혜옹주에 관해 글을 적어 보겠습니다. 고종의 늦둥이 딸로 태어난 옹주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 고종과 궁녀인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종이 회갑을 맞던 해에 얻은 늦둥이 딸이었으므로 아주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였기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인 것입니다. 당시에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오늘날의 비서실) 기록에는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
고려시대 왕 중에서 태조 왕건 다음으로 잘 알려진 왕이 제31대 왕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일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개혁군주이다.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부인인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의 등용 등 여러 가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왕이기도 하다. 위태위태한 고려왕 공민왕이 살았던 시기는 국내외 정세가 격동하던 때였다. 원나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충렬왕대 이후 고려 국왕은 폐위와 복위가 반복되는 자리였다. 충렬·충선·충숙 세 왕이 각각 중간에 한 차례씩 폐위되었다가 복위하였고, 충혜·충목·충정 세 왕은 각각 5년도 채 안 되어 폐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왕조..
고려를 세운 왕건은 각 지역 호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30여 개의 호족집안 딸들과 결혼을 했다. 그 가운데 황주 지역의 호족 출신인 황주원부인도 있었다. 황주의 황보씨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바가 컸다. 황주원부인의 아들인 왕욱이 천추태후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선의왕후로, 왕건이 정덕왕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왕건의 자손이다. 이복남매끼리의 혼인인데, 고려 초기 왕실에서는 흔한 일이다. 당시 왕실의 여자들은 거의 왕족과만 결혼했다. 왕건의 손녀이며 경종의 비, 목종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는,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비난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당대의 관습을 무시한, 조선의 성리학적 사관에 입각한 평가이..
명성황후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이다. 1851년(철종 2)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왕비로 간택되었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척족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협력자로 나서서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립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거듭된 국내 정변의 중심에 있었고, 청·일의 간섭으로 인한 혼란 속에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이 살해했다. 사후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후로 추숭 되었다.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우봉(牛峰) 이 씨이다. 부친은 이호석(李鎬奭)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1867년 10세 때 친척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던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호준은 청렴한 관리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이완용은 양부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13세 때 양주조 씨(楊州趙氏)와 혼인하였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1886년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에 임명되었다. 이후 검교(檢校)·홍문관 수찬(修撰)·동학교수(東學敎授)·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다.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