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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외동딸 덕혜옹주(1912.5.25~1989.4.21). 일본인과 강제 결혼, 조발성치매, 이혼등의 비극을 겪으며 순탄치 않은 세상을 살다 간 덕혜옹주에 관해 글을 적어 보겠습니다.
고종의 늦둥이 딸로 태어난 옹주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 고종과 궁녀인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종이 회갑을 맞던 해에 얻은 늦둥이
딸이었으므로 아주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였기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인 것입니다. 당시에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오늘날의 비서실) 기록에는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초칠일이 지나야 산모를 찾는데 환갑에 얻은 늦둥이가 귀여웠기 때문일까 고종은 이례적으로 직접 당일날
산모를 찾았습니다.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고종은 늘 그녀와 함께 했으며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옹주를 데리고 오기도 하였으며 1916년 다섯 살의 덕혜옹주를 위해 준명당에 유치원을 개설하고 외롭지 않게 또래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습니다. 고종이 덕혜옹주를 세심하게 배려한 부분이 준명당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데 건물 바깥에 일정한 간격의
홈이 파여 있는데 행여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까 봐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덕혜옹주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 고종과 함께 보냈습니다. 고종에게 덕혜옹주는 쓸쓸한 말년에
찾아온 한줄기 빛이었고 덕혜는 아버지에 대한 정이 그만큼 깊었습니다.
덕혜옹주는 서녀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17년 여섯 살 때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습니다. 고종은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어서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고 급기야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하고 맙니다. 두 부녀의 행복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면서 끝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덕혜옹주의 송두리째 바뀐 삶
1921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후 덕혜옹주의 교육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는데 이때 그의 나이 열 살 때입니다. 일본은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덕혜옹주에게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시키려 했습니다.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입학하여 다녔으며 당시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리다가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됩니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라는 일본의 강요에 순종은 덕혜옹주에게 동경 유학을 명하여
14세의 어린 나이에 정든 궁궐을 떠나 일본이라는 낯선 이국땅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여
3월 30일 오전 8시 이방자 여사의 마중과 함께 도쿄에 도착합니다. 그해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덕혜옹주는 항상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그 이유를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을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나는데 그 이유는 일제가 덕혜옹주를 국장에 참석하는 것은 원치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생모인 귀인 양 씨가 1929년 5월 30일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니 덕혜옹주는 이국땅에서
고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비극적인 결혼 생활
덕혜옹주는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는데 조발성치매증
(조현병)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가 좋아졌다고 합니다. 1931년 5월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을 하였는데
일제에 의한 정략결혼으로 일본인 아내를 맞이한 영친왕과 같은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때 조선일보는 신랑의 얼굴을
삭제한 결혼식 사진을 실어 분노한 민심을 대변하기도 하였습니다.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가 태어났고 덕혜옹주는
얼마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혼 후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이 집에서 간병을 하였지만 호전되지 않아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패망 후 남편인 소 다케유키는 더 이상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병원으로 덕혜옹주를 옮기게 된 것입니다. 덕혜옹주는 결국 법적
보호자였던 영친왕과의 합의를 통해 남편 소 다케유키와 이혼을 합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고 약 15년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이즈음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 결혼하였지만 이혼을 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이 됩니다. 나라를 빼앗긴 데다가 부모님도 일찍 잃고
남편과 자식까지 떠나보낸 망국의 옹주는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가혹한 운명이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정신질환자가 되어 돌아온 고국
덕혜옹주는 1945년 해방 이후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고국의 궁궐에 가기를 원했지만 이마저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마침내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결국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호적이 만들어집니다. 14세의 꽃다운 소녀가 어느덧 51세의 중년으로 풍상에 찌든 얼굴과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37년 만에 귀국을 하였습니다.
귀국 후 덕혜옹주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요양했지만 병세는 크게 회복되지 않았으며 1967년부터 말년까지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낙선재는 1847년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 씨를 위해지어 준 것으로 헌종의 사랑채가 낙선재,
경빈 김 씨의 거처인 안체가 석복헌, 대비인 순원왕후를 위해 중수한 건물이 수강재입니다.
1963년 영친왕 이은이 환국 후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하며 덕혜옹주는 귀국 후 수강재에서 머물렀는데 덕혜옹주가
돌아온 이듬해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1901~1989)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며 그로부터 9일 뒤인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덕혜옹주가 정신이 맑았을 때 썼다는 낙서가 한 장이 남아 있는데요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대한민국 우리나라'
왠지 이 낙서를 읽으니 가슴 한켠이 시려오고 뭉클해집니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혀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시고 일제의 만행에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삶을 살다 간 덕혜옹주의 아픔을 기억하며
낙선재를 한번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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