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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세운 왕건은 각 지역 호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30여 개의 호족집안 딸들과 결혼을 했다. 그 가운데 황주 지역의 호족 출신인 황주원부인도 있었다. 황주의 황보씨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바가 컸다. 황주원부인의 아들인 왕욱이 천추태후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선의왕후로, 왕건이 정덕왕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왕건의 자손이다. 이복남매끼리의 혼인인데, 고려 초기 왕실에서는 흔한 일이다. 당시 왕실의 여자들은 거의 왕족과만 결혼했다.
왕건의 손녀이며 경종의 비, 목종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는,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비난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당대의 관습을 무시한, 조선의 성리학적 사관에 입각한 평가이다. 전통을 중시하고 강한 고려를 꿈꿨던, 정치적인 야망과 능력이 탁월했던 여걸 천추태후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아버지는 왕욱[王旭, 대종(戴宗)], 어머니는 선의왕후(宣義王后)이다. 태후는 사촌인 경종과 혼인하여 동성혼을 피하고자 할머니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의 성씨를 따 황주 황보 씨(黃州 皇甫氏)를 칭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왕건(王建)의 일곱째 아들인 왕욱[王旭,? ~ 969, 성종이 즉위한 뒤에 대종(戴宗)으로 추존]의 딸이며, 고려의 제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의 친누이이다. 아버지인 왕욱과 어머니 선의태후(宣義太后) 유 씨(柳氏)가 모두 일찍 죽어, 할머니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 씨(皇甫氏)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동생인 헌정왕후(獻貞王后,?~992)와 함께 황보 씨의 성을 사용하였다. 황보 씨는 황주(黃州)의 유력 호족(豪族)으로 신정왕후의 딸인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 씨도 태조의 넷째 아들인 제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비(妃)가 되어 제5대 경종(景宗, 재위 975∼981)을 낳아 외척(外戚)으로 대를 이어 권세를 누렸다. 그리고 광종이 호족의 군사적·재정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등 중앙집권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자, 대목왕후를 앞세워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
광종의 호족견제정책에 억눌리며 황주 세력의 부활을 꿈꾸었던 황주원부인은 천추태후와 헌정왕후 자매를 경종에게 시집보냈다. 외손자에게 친손녀 둘을 한꺼번에 시집보낸 것이다. 경종에게는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천추태후가 유일한 왕자 송(980년)을 낳으면서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런데 송이 태어난 지 1년 2개월 만에 경종이 사망하고 만다. 경종 즉위(981년) 6년 만의 일이다. 후계자로 어린 원자와 천추태후의 오빠인 개령군, 왕건의 또 다른 아들 대량원군이 거론되었다. 천추태후의 아들은 너무 어렸고, 대량원군은 어머니가 신라 계열이라 고려의 주류 세력들이 선호하지 않았다. 반면 개령군은 왕실의 최고어른인 황주원부인의 손자로 황주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유학적인 소양도 있어 광종 때조정에 많이 들어온 귀화인들, 그리고 최승로 등의 친 신라계 인물들도 선호했다.
겨우 2살밖에 되지 않은 송을 대신해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친오빠인 왕치(王治)가 광종의 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고려의 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다.
천추태후보다 네 살 많은 오빠이다. 열여덟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천추태후의 옆을 지킨 것은 김치양이라는 남자이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어머니 쪽 친척으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김치양이 거짓으로 머리를 깎고 천추태후를 만나러 드나들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불교와 가까웠던 것을 보면 얼마 동안 승려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천추태후가 이후 조선시대의 역사가들에게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장면으로,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여성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남녀의 교제가 자유로웠고, 이혼과 재혼도 많았다. 남편을 잃은 젊은 여성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사회였다. 더구나 천추태후는 방탕했던 것도 아니고, 마지막까지 오직 김치양과 함께했다. 문제는 성종이 유학 교육을 받았고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누이의 사랑을 안 성종은 김치양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 버렸다. 자신이 펼치려는 유학 기반의 정치에 누이의 행동이 위배된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천추태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는 데에는 최승로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당연히 이들은 권력의 핵심에 섰고, 이들의 건의를 바탕으로 성종은 유교 중심의 정책들을 펴나갔다.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강화하고 지방 호족을 향리(鄕吏)로 편입해 통제하는 등 중앙집권적 개혁 정치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거란이 침입하자 대부분의 중신이 거란에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에 찬성하는 등 문약한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거란은 물러났지만, 무기력한 유학자들의 모습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990년 아들이 없던 성종은 천추태후의 아들인 왕송을 개령군에 책봉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작위를 조카에게 물려준 것은 그가 왕위계승자임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왕송이 후계자가 되면서 천추태후는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이 무렵 성종의 또 다른 여자형제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천추태후와 함께 경종의 비가 되었던 헌정왕후인데, 역시 젊은 나이에 혼자된 헌정왕후도 새로운 사랑을 만난 것이다. 상대는 앞에서 성종과 왕위를 다투었던 대량원군이다. 대량원군의 집에 불이 나 급히 위로하러 갔다가 만삭의 헌정왕후를 발견한 성종은 크게 화를 내며 대량원군을 유배 보냈다.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는 모습을 배웅하던 헌정왕후는 아들을 난산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낳은 아들이 뒷날 천추태후의 아들(목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는 왕순(현종)이다.
성종이 38세(997년)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마침내 천추태후의 아들 왕송이 보위에 올랐다. 제7대 목종(재위 997~1009)이다. 즉위할 당시 목종의 나이는 18세였다. 고려시대에 그 나이면 이미 성인이다. 그런데 34세의 천추태후는 섭정을 맡고 나섰다. 아들의 등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황실뿐 아니라 정권 전체에 강력한 카리스마와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권력을 움켜쥔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事) 등의 지위에 앉히며 중용하며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다. 또한 스스로를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한다고 해서 '천추태후'라고 불렸으며, 황제국 고려를 다시 천명했고, 유교 대신 불교를 장려했다. 그리고 황보 씨의 본거지인 서경(西京)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김치양의 출신지인 서흥(瑞興)에 성수사(星宿寺)를 세우는 등 곳곳에 도관과 사원을 건립하였다. 연등회를 비롯한 고려 전통정책들을 부활시켰고, 강한 고려를 꿈꾸며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북방 변경 지역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들은 뒷날 거란의 침입 때 훌륭한 방어선이 된다.
1003년(목종 6년),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에게 목종(穆宗)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였다. 이유는 목종이 후사를 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목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는다면 헌정왕후와 왕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왕순이 뒤를 이어야 할 상황이었다.왕건의 적통인 자신의 아들이기에 왕위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스스로를 황제의 지위에 두었음을 의미히기도 한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열두 살의 왕순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개경 숭교사로 보내버렸다. 1006년(목종 9년)에는 그를 남경(南京)의 신혈사(神穴寺)로 보냈고,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1009년(목종 12년) 정월, 고려의 제7대왕 목종이 연등 행사를 구경하고 있을 때 천추전에 불이 났다. 궁궐의 기름 창고에서 불이나, 목종의 모후가 거처하는 천추전으로 옮겨 붙었다.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다. 정변이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정변 세력이 대궐을 장악했다. 이후 왕이 아파서 안에서만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왕은 감금되어 있었을 것이다.불타는 전각을 빠져나온 천추태후는 연인 김치양과 함께 반란군들과 대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는 서경의 군권을 쥐고 있던 강조를 불러 이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강조는 목종을 버리고 반란군들의 편에 섰다. 강조는 김치양이 난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며 그의 아들을 비롯한 7명을 죽이고, 30여 명을 귀양 보냄으로써 쿠데타를 성공하고 대량원군 왕순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그가 고려의 제8대 왕인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이다.
천추태후는 목종과 함께 궁에서 쫓겨났다. 겨우 말 두 필을 얻어 목종과 태후가 타고, 어의를 벗어 음식을 마련해가며 길을 나섰다. 태후가 음식을 먹고자 하면 왕이 친히 그릇을 받들었고 태후가 말을 타고자 하면 왕이 친히 고삐를 잡았다. 목종과 태후의 행렬이 적성현에 이르렀을 때 강조가 보낸 군사들이 독을 가져와 목종에게 올렸다. 목종이 마시려 하지 않자 이들은 목종을 시해하고 나서자살했다고 거짓보고를 했다.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을 천추태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불과 며칠 전 사랑하는 남자와 그와의 사이에서 얻은 어린 아들까지 잃었는데...... 절망 속에서 천추태후는 고향인 황주로 유배를 갔다. 사실 목종 시대 권력의 핵심은 천추태후였다. 그러나 반란군은 천추태후를 죽이지 않았다. 김치양과 두 아들을 모두 죽여 크게 위험하지 않다고 보았을 수도 있지만, 천추태후가 갖는 무게가 고려 초기 역사에서 그만큼 무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추태후는 유배되었다가 뒤에 할머니의 고향인 황주로 추방되었다. 태후는 황주에 21년 동안 머물다가 병이 들자 개경으로 돌아왔다. 1029년(현종 20) 정월에 숭덕궁(崇德宮)에서 66세로 사망했으며, 유릉(幽陵)에 묻혔다. 시호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 능호는 유릉(幽陵)이라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사서에서는 천추태후를 김치양과 사통 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당대의 관습을 무시하고 조선의 성리학적 사관에 기초해 이루어진 왜곡된 평가라는 비판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학의 정치이념을 강조했던 성종에 맞서 전통사상을 강조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등 북진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로 재평가하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학은 사대주의, 전통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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