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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우봉(牛峰) 이 씨이다. 부친은 이호석(李鎬奭)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1867년 10세 때 친척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던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호준은 청렴한 관리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이완용은 양부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13세 때 양주조 씨(楊州趙氏)와 혼인하였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1886년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에 임명되었다. 이후 검교(檢校)·홍문관 수찬(修撰)·동학교수(東學敎授)·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이완용(李完用)은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기의 관료이며 서예가로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부친은 이호석(李鎬奭)이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호준(李鎬俊)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1872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총명하기로 소문이 나 10살 때 당시 막강한 권력과 인맥을 가지고 있었던 이호준의 양자로 입적되어 명문가의 자제로서 교육을 받으며 인맥을 쌓게 되었다.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시경’(詩經) 등 동양 고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다.
『일당기사(一堂記事)』에 의하면 생후 10개월에 걸었고, 13개월에 말을 했으며, 6살에 『천자문』을 몇 개월 만에 떼고, 『동몽선습』을 배웠으며, 7살에 『효경』을 생부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11살에 처음으로 스승 정익호(鄭翼浩)로부터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전』을 배워 동양 고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다.
1882년 25세에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피신해 있던 중전의 환궁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증광별시(增廣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6년 규장각대교 · 홍문관 수찬 · 우영군사마 · 의정부 검상을 거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친로파(親露派) 내각의 외무대신을 지냈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 좌원(左院)의 학생이 되어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입학 당시에 대해 『일당기사(一堂記事)』에서 "나는 20세까지는 한학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하였으나, 갑오경장의 운이 도래하여 존도 숭유(尊道崇儒)의 기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됨에 서양과의 교류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학문을 고수하기 곤란해서 서양학문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당시는 미국과의 교제가 요긴했기 때문에 그때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미국으로 갔다"라고 회고한 기록이 있다.
1887년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현지생활에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병을 얻었고 이듬해 5월 귀국하여 요양 생활을 했다. 이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다. 1888년 12월 고종의 명으로 미국공사관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1890년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을 역임하였다. 그는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개화파가 되었지만 조선왕실에 대해 개화를 주창하지 않았으며 유교와 전통사상을 고수했다. 이후 주미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모임에 가담하여 구미인(歐美人)을 중심으로 친러파 세력이 결집되었으며 정동파(貞洞派) 수장으로 친일, 친청세력을 견제하였다.
제2차 김홍집내각이 와해되고 박정양(朴定陽)이 과도정부의 내각총리가 되자 이완용은 내무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박영효 등 개화파의 급진적인 정책에 반대하였으며 온건책을 견지하였다. 1895년 제3차 김홍집내각이 들어서자 학부대신(學部大臣)·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으며 성균관을 개편하고 소학교를 열어 근대적인 교육정책을 펼쳤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자 친일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대원군이 주도하는 제4차 친일파 김홍집내각이 들어서고 이완용은 해임되었다. 이완용은 미국공사관에 머물면서 감금된 고종황제를 궁궐 밖으로 탈출시켜 친러내각의 복원을 시도하였고 결국 춘생문(春生問)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보다 러시아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이자 1896년(건양 1년) 고종황제를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획하였다. 이완용은 외부대신·학부대신·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고 독립협회가 이를 반대하면서 이완용은 이를 중재하려 하였지만 양쪽 모두에게 배척되었다. 1897년 내각에서 밀려나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가 1898년 전라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양부 이호준이 죽자 고향으로 내려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임명되었다. 고종황제는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데프트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완용은 이때부터 변절하여 친일파로 바뀌었으며 1905년 박제순(朴齊純) 내각에 들어가 학부대신이 되어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을사조약 체결을 제의하자, 이를 지지하여 일본군의 무력시위 아래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을 협박, 조약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관심을 받게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박제순 대신 의정부참정대신(議政府叅政大臣)에 올라서 농상공부대신서리 · 광산사무국총재까지 겸하였다.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치고,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고영희(高永喜) · 군부대신(軍部大臣) 이병무(李秉武) ·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 내부대신 임선준(任善準) · 법부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 · 농상공부대신 송병준(宋秉畯)으로 내각을 조직, 6월 관제를 개혁할 때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이 되어 매국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박영효(朴泳孝)의 뒤를 이어 궁내부대신사무서리(宮內府大臣事務署理)를 겸하였다.
7월에 일어난 헤이그밀사 사건을 계기로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아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하여 순종이 즉위하게 한 뒤 정미 7 조약의 체결에 관여하여 내정권을 박탈당하게 함으로써 정미칠적(丁美七賊) 되었으며, 군대해산을 하는 등 일련의 친일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일본국 훈(勳) 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고, 한국대훈(韓國大勳)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에 특서 되었다. 영친왕의 소사(小師)를 겸임하고 정1품으로 보국(輔國) 승진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국권침탈 직후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귀족 자작의 작위와 3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08년 일본으로부터 금제유공장(金製有功章)을 받았으며, 대한여자흥학회 고문이 되었다. 1909년 순종의 지방 순행을 호종(扈從)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저격당하자 인천항을 통해 다롄으로 가서 조문하였으며, 장충단에 이토의 영정을 설치한 후 조의를 표하게 하였다. 이후 일본의 여론이 격앙되면서 조선문제동지회를 결성하여 대한제국합방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이완용은 가쓰라 수상에게 합방 5조건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12월 벨기에 총영사 주최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명동성당 앞에서 자객 이재명(李在明)의 칼에 맞아 어깨와 허리에 중상을 입었으나 수술 후 회생하였다. 이때 고종과 순종은 거의 매일 시종을 보내 경과를 물었고, 고종은 위로금 1천 원, 대한제국 관료와 일본인들이 2만 원을 넘게 보내왔다.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를 열어 합병안을 가결하게 하는 동시에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韓日兩國倂合全權委員)이 되어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관사로 찾아가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고, 29일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고 1911년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영친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고종의 죽음으로 돌아와 장례를 주도하였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侯爵)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농림주식회사고문 · 교육조사위원 · 총독부산업조사위원 · 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 · 조선사편찬위원회고문 · 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 · 선만노몽연구협회고문 등의 명예직을 겸하여 마지막까지 일본에 협조하였다.
1926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글씨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이완용은 정치 행적과 달리 당대의 명필로 알려졌다. 문화와 관련된 직책도 맡은 적이 있다. 미술 단체에도 직접 관여하여 1911년 미술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에서 3회까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이 전람회의 서예 부분 주임으로 사망 전까지 활동하였다. 이완용은 당시 구한말 서단(書壇)에 유행하였던 미불(米芾) · 동기창(董其昌)의 서법을 깊이 연구하고 연마하여 자신만의 서풍(書風)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인 안진경(顔眞卿)의 필획을 즐겨 썼다. 해서(楷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 · 전서(篆書) · 예서(隸書) · 팔분체(八分體) 등에 두루 잘 썼으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초년작보다 말년 작품이 기교가 더 많고, 장법의 균형이 맞지 않아 대소장단의 적절한 안배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조화미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말년으로 갈수록 가벼운 운필로 인하여 필획에 힘이 없고 속기가 많이 흐르며 골기가 약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필체의 특징이 행초서로 쓴 간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서예가로서의 명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완용의 오늘날 작품이 주목받지 못하는 까닭은 '서여기인(書如其人)'설에 의해 친일행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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