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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이다. 1851년(철종 2)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왕비로 간택되었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척족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협력자로 나서서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립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거듭된 국내 정변의 중심에 있었고, 청·일의 간섭으로 인한 혼란 속에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이 살해했다. 사후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후로 추숭 되었다.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을 쥔 것은 지아비인 왕이 죽고 난 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청정하면서라던가, 아니면 명문가인 친정을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명성황후는 이전의 왕비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지아비인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으며,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도 더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명문가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왕비가 되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정세력을 키웠다. 살아 있는 왕보다도 더 주목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눠 가졌다고도 보이는 명성황후의 존재는 당시 망국으로 치닫는 조선의 특수상황을 고려하고 생각하여도 매우 특이하고도 경이롭다.

 

 

명성황후는 여흥 민 씨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씨가였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었다. 이런 가계를 통해 볼 때 명성황후 집안은 당색으로는 서인계였고 아버지 민치록이 세도정치기인 철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읜 이후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감고당(6대조 민유중의 집으로 당시 민치록이 소유하고 있었다. 감고당이란 이름은 영조가 지어주었다)에서 기거하였다.

 

명성황후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특히 훗날 왕비 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척 아주머니 민 씨 부인의 마음에 퍽 들었다. 이 민씨 부인은 바로 당시 아들 고종을 앞세워 조선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 씨였다. 부대부인 민 씨는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간 민승호의 누나였다. 그녀는 둘째 아들 고종의 왕비로 자신과 친인척관계이던 명성황후를 적극적으로 대원군에게 추천하였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타계하자, 조대비의 명에 의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3년 뒤인 1866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 씨의 역할에 의해 16세 때 왕비로 간택되었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친정이 단출한 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왕비를 내세운 안동김 씨의 외척 세도정치를 무척이나 경계하던 대원군은 몰락한 친정을 둔 왕비가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뒤집어졌다. 총명했던 명성황후는 양 오빠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의 처남인 민승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고 대원군의 형인 이최응,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고종의 맏형)까지도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고 고종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친인척을 모두 끌어들인 후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의해 정계에서 밀려난 안동김 씨 세력과 대원군이 권력을 잡게 해 주었지만 결국 반목하게 된 풍양 조 씨 세력까지 끌어들였다. 사방에서 대원군이 운신할 범위를 점차로 좁혀 나갔던 것이다.

 

명성황후가 처음부터 대원군에 맞서는 지략적인 정치가였던 것은 아니다. 명성황후와 혼례를 치를 무렵 고종은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상궁 출신의 궁인 이 씨를 매우 총애하여 가까이 두고 정작 정식 왕비인 명성황후는 냉대했던 것이다. 여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인 이 씨가 아들 완화군을 낳자 궁중의 관심은 모두 궁인 이 씨에게로 몰렸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까지 했다.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졌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에 원자가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을 가지고 대원군과 더욱 대립하였다.

마침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유로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이를 이용하여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고,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1873). 

 

고종과 왕비는 개화정책을 추구하였으나, 안에서는 보수유생, 구식군대, 급진개화파, 동학농민군의 도전에 직면하였고, 밖으로는 청국의 강화된 내정간섭으로 국정이 표류하였다.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여 명성황후가 힘을 기르기 위해 키웠던 민 씨 세력이 위협당하자 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하였다. 국내가 혼란해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힘을 빌렸고, 명성황후가 오랫동안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려 하였다. 이때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민 씨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욱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민 씨들의 힘을 모으는 다소 파행적인 정국 운영을 해나가기 시작하였다.

 

1884년에는 청의 개입으로 더뎌진 개화에 불만을 품은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왕권이 위협받자 명성황후는 심상훈(沈相薰) 등을 통하여 더욱 청나라와 가까이하게 되었고  3일 만에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후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신하들과 아버지(대원군)에게조차 권력에 도전을 받은 고종은 명성황후와 더욱 밀착되었고 모든 국정을 그녀와 의논하였다. 특히 외교적인 문제는 명성황후와 거의 뜻을 같이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사리판단이 비교적 명확했던 명성황후였지만 목숨마저 위협받은 환란을 겪은 후 그녀는 권력에 대해 지나치게 강렬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치성을 하는 등 국고를 낭비하는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에 대한 외국 측의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그녀가 가냘프지만 영민하고 총명하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인이었다고 쓰여있다.

19세기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황후를 알현한 후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명성황후에 대해 또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틈타 일본이 무단으로 조선에 파병하여 경복궁을 침략, 조선 조정을 장악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궁중에 연금된 상태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러시아 주도의 삼국간섭에 의해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였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대한 접근을 통해 군주권 회복을 추구하였고, 조선 보호국화가 좌절된 일본정부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공사로 파견하였다. 이처럼 내외의 격동 속에 고종을 적극 내조해 왔으나,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이다. 이 을미사변을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사건 직후 일본 정계의 요인과 외교관, 기쿠치 겐죠[菊池謙讓] 등 언론인은 명성황후가 부패의 화신으로서 조선을 망친 ‘궁중의 암탉’이며,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범죄로 덮어 씌웠다. 미우라 공사는 ‘흥선대원군의 요청에 응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궁궐에 도착해 보니 사건은 일단락된 뒤였다. 이 사건과 일본 군민은 무관하다’하였다. Japan Daily Mail 등 일본의 영자신문은 이 사건을 ‘중세의 야만왕조’인 조선 궁중의 암투에서 빚어진 것으로 호도하였다. 이런 사실의 왜곡은 일제하에도 지속되었다.

 

외세에 의한 왕비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하였지만, 고종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국격을 훼손당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시해 직후 대원군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고종에 의해 복호 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1897년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황후로 추봉 되었다.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 11월 가서야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되었다.  1919년 고종의 장례 때 경기도 남양주 금곡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요절한 두 아들 다음에 낳은 셋째 아들이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살해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대원군의 쇄국 정치에 반대하여 미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나라를 열었지만 급진적 개혁은 원하지 않아 개화파의 불만을 샀고, 일본을 물리치려고 외세를 끌어들였으며 그녀의 친정이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등시대를 역행했다는 것이 주요한 비판의 이유였다. 한편에서는, 똑같은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명성황후가 지나친 쇄국과 급진적 개혁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고, 열강들을 이용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외교술을 펼쳤으며, 그녀가 의도적으로 키운 외척들이 훗날 고종의 측근이 되어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했고 이것이 독립운동과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경기도 여주 생가에 명성황후기념관이 들어서 매년 추모행사를 하고 있고, 명성황후의 일생을 조명한 뮤지컬과 영화, 드라마가 제작되어 한류의 창출에 기여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시해에 가담한 범죄자들의 후손이 중심이 되어 민간 차원의 사죄와 함께 한일 간의 친선 교류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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