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665년(보장왕 24)에 사망했다. 동부 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당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과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의 성(姓)은 ‘연(淵)’씨 혹은 ‘천(泉)’씨인데,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대중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가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온달(溫達)은 역사적 인물이자 문학적인 인물이다. 평강왕 시대 고구려의 대형(大兄) 벼슬을 한 장수였는가 하면, 김부식의 노련한 붓놀림으로 매우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상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바보에서 장수까지 가장 극적인 생애를 살다 간 온달에게 많은 사람의 애정과 관심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수사의 전모를 살펴보자. 고구려 평원왕~영양왕 때의 장군으로 북주(北周)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아단성(阿旦城)에서 전사했다. 고구려 제25대 평강왕(재위 559∼590)은 평원왕또는 평국왕이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양원왕의 큰아들로 태어나 왕 13년(557)에 태자가 되고..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재위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옥사를 일으켰고, 외교에서는 실리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군주가 되었다. 조선왕조 제1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까지이다. 이름은 이혼(李琿), 본관은 전주,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 씨(恭嬪金氏)이며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4월, 20만 일본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른바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7년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은 전투 초반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의주로 몽진하는 등 패색이 짙었다. ..
1476년(성종 7) 11월 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 씨이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 씨는 성종(成宗)의 첫 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妃)로 책봉되었다. 이름은 이융(李)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연(書筵)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燕山君, 1476. 11. 7~1506. 11. 6, 재위 1495~1506)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군주일 것이다. 그 명성은 물론 오명이다. 12년에 걸친 길지 않은 ..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 시와 그림에 능한 예술가이자 율곡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 48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로서, 그리고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사임당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상징하는 인물로 5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신사임당만큼 존경받은 여성도 드물다. 그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여성 최초로 고액권인 5만 원 화폐 도안 인물로까지 이어졌다. 선덕여왕, 유관순 열사 등 몇몇 후보 인물들이 있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신사임당이 최종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녀의 삶은 50년이 채 안 되지만 그녀에 대한 한국인들의..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매우 총명한 왕으로 ‘빼어나게 용맹스러웠으며 담대한 결단력이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해동증자’라(효를 강조했던 중국의 사상가 증자에 빗대어 부른 말) 불리며 성군 소리를 들었고,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벌이던 의자왕(?~660, 재위 641~660)이 13만 대군 나, 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는 무기력하게 700여 년의 백제가 멸망하였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대로 음란과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났던 것인가???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용감하고 담력이 뛰어나 일찍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서동요’로 널리 알려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로맨스를 기록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