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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재위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옥사를 일으켰고, 외교에서는 실리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군주가 되었다. 조선왕조 제1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까지이다. 이름은 이혼(李琿), 본관은 전주,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 씨(恭嬪金氏)이며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4월, 20만 일본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른바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7년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은 전투 초반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의주로 몽진하는 등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해전에서 계속되는 이순신의 승전보 소식과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그리고 명군의 참전 등으로 전세가 우리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결국 이 땅 조선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처럼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열거되는데, 여기에 하나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광해군의 분조(分朝) 활동이 아닌가 한다.
분조란 말 그대로 ‘조정을 나누다’ 또는 ‘조정의 분소’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와 평양 등지에 상주하였던 선조(宣祖)가 있던 원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주도하던 조정을 말한다. 선조에게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적자가 없어서, 당시로서는 후궁 소생을 세자로 책봉해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발발 몇 해 전 정철(鄭澈) 등이 건저의(健儲議,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를 제기, 정치적 파란이 있기도 하였다. 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 조선은 다급했다. 결국 부리나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겼다.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분조의 책임자 광해군은 전쟁 기간 중 평안도나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의 분조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분조의 활동 등으로 임진왜란 때 상당한 공로를 세운 광해군이었기에, 그는 아마도 내심 세자의 자리가 굳건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하여, 선조가 55세가 되는 해인 1606년(선조 39)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였다. 더구나 평소 광해군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선조였기에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유영경 같은 이는 세종 때 고사를 원용해 갓 태어난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올리기도 할 정도였다.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조는 간혹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루는 병중에 있던 선조가 족자에 대나무를 그렸다. 하나는 바위 위에 왕대(王竹)가 늙어 바람과 서리를 겪어 꺾이고 마르는 모습이요, 또 하나는 악죽(悪竹)이 왕대 곁에서부터 뻗어나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데, 긴 마디가 한 치를 넘어, 너럭바위를 넓게 점거한 채 꾸불꾸불 서리서리 엉킨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연한 죽순이 돌 위에 왕죽의 원줄기로부터 뽑혀 나와 어린 가지와 연한 잎이 비록 아직 장성하지는 못했으나, 싱싱하고 운치 있는 바른 죽순이 하늘을 찌르고 달을 희롱할 기상이 있었다.
며칠 뒤 선조는 이항복ㆍ이덕형ㆍ유영경ㆍ이홍로 등을 인견하고는 내시에게 족자를 가져오게 하여 보여주며 이르기를, “내가 병중에 우연히 한 대나무를 그렸는데 솜씨가 어떠한가?”라며 물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기함을 칭송할 뿐이었으나 유영경이나 이홍로 등은 선조의 의중을 간파하였으니, 이홍로 같은 인물은, “전하의 오늘의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죽은 선조를, 악죽은 광해군을, 어린 죽순은 영창대군을 비유한 것인데, 이홍로나 유영경은 국왕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었다. 심지어 선조는 승하 직전 세자 광해군이 문안하는 것을 아뢰면,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감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광해군의 손을 들어주어 큰 변화 없이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결국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파란의 예고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말끔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도처에 산재하였다. 왕위에 오른 직후 선조 말년에 자신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의 핵심인 유영경과 그 일당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안 되어서 선조의 승하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알리고자 연릉부원군 이호민과오억령 등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 중국과의 사대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이나 왕비의 승하나 책봉 등이 있을 경우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이를 통보하고 그에 합당한 조서 등을 받음으로써 정통성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명나라 조정에서 선조에게 장자가 되는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이호민 등이 이런저런 이유를 말했으나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급기야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이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결국 임해군에게 미친 행세를 하도록 해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순탄치 않은 왕좌였다.
임해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여 광해군의 왕위가 바로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는 배다른 형제로 적자인 영창대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창대군의 존재는 항상 광해군의 왕권에 부담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에게 엉뚱한 방향에서 호기가 다가왔다. 1613년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치인·박치의·허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박응서 등이 모사를 꾸미기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조령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흔히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 한다. 체포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물론 후일 이 일은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결국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1618년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하나둘씩 제거해 가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면서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데 주력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폐위되기 전까지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창덕궁을 중건, 경덕궁(경희궁)·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궁궐 조성에 힘썼다.
또한 허준을 지원해 동의보감 편찬을 마무리했다. 아울러 그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대외관계 속에서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전향적 자세를 보였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동안 조선의 사대국가로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파병으로 재정이나 군사력 부분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 그 결과 사방에서 지방 세력이 발호하고 변방에서 야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때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신흥국가로 성장하여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서서히 명나라는 기울어져 갔으며, 반면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전개되던 대외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국가의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한편 무기 제조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였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멸망하는 용의 꼬리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성장하는 뱀의 머리를 잡을 것인가?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광해군은 철저하게 실리를 선택하였다.
마침 1618년 명나라에서 조선에 군사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앞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도와준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서둘러서 파병해야만 하였다. 당시 대부분 조정 신료들은 명나라의 요청에 신속하게 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시세를 관망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파병 군사의 대장이었던 강홍립에게 비밀 교지를 내려 후금과 대적하지 말고 시세를 보아 판단하라고 하였다. 전장에 도착한 뒤 치러진 심하 전투에서 대패하자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대로 오랑캐 진영과 협상을 하고 무조건 항복하였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일행은 이후 광해군과 개인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후금의 동정을 알려주었다,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파견함과 동시에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과 후금사이에서 능란한 중립외교솜씨를 보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의 부득이한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일본과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고, 회답 겸 쇄환사로 오윤겸(吳允謙)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쇄환 하였다.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실록(宣祖實錄)》 등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축출됨으로써 통상의 다른 왕들이 갖는 묘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서인이 주동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광해군 가족은 강화도로 유폐되었는데 폐세자 이질과 세자빈은 강화 서문 쪽에 안치되었고 광해군과 폐비 유 씨는 동문 쪽에 안치되었다. 이질은 강화에서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붙잡혔고, 자결을 명 받아 숙주(熟紬)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세자빈도 자결하였다. 이듬해인 1624년 폐비 유 씨도 사망하였고 광해군은 이후 제주도로 이배 되었다가 1641년에 사망하였다. 묘호는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묘호(廟號)이다. 묘호는 국상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에 안치할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당사자 사후에 붙여지는 이름이니 당사자들은 알 리가 없는 이름이다. 묘호의 제정은 또한 제정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권력의 향배가 중요한 변수이다.
흔히 묘호에는 조(祖)나 종(宗)이 붙게 마련이다. 태조니 태종이니 세종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재위했음에도 그는 왕자, 그것도 적장자가 아닌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붙여지는 군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불려지고 있다. 혹자는 그가 후궁 소생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후대이지만 장희빈 소생인 경종과 숙빈 최 씨 소생인 영조는 종과 조가 붙여지지 않았는가. 단종은 노산군으로 불리며 묘호조차 갖지 못하다가 사후 250여 년이 지난 숙종대 묘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후 어느 시기에도 그의 묘호에 대한 논의조차 없었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된 이유는 패륜적 행위와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지배층인 사림들은 명분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인륜을 중시한 것은 물론이고, 대중국관계에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왔던 명나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취한 모습은 이것과 사뭇 달랐다. 이렇게 보면 광해군이 묘호를 갖지 못한 것은 시대의 이상과 다른 방향을 추구한 결과가 아닐까? 이상적으로 본다면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준 명나라를 돕는 것이 맞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상적으로 본다면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들을 포용하며 정치를 하는 것이 맞겠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는 것 아닐까? 이상과 현실의 조화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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