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이다. 1851년(철종 2)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왕비로 간택되었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척족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협력자로 나서서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립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거듭된 국내 정변의 중심에 있었고, 청·일의 간섭으로 인한 혼란 속에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이 살해했다. 사후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후로 추숭 되었다.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우봉(牛峰) 이 씨이다. 부친은 이호석(李鎬奭)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1867년 10세 때 친척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던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호준은 청렴한 관리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이완용은 양부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13세 때 양주조 씨(楊州趙氏)와 혼인하였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1886년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에 임명되었다. 이후 검교(檢校)·홍문관 수찬(修撰)·동학교수(東學敎授)·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字)로 사용하였다.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
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665년(보장왕 24)에 사망했다. 동부 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당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과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의 성(姓)은 ‘연(淵)’씨 혹은 ‘천(泉)’씨인데,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대중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가계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온달(溫達)은 역사적 인물이자 문학적인 인물이다. 평강왕 시대 고구려의 대형(大兄) 벼슬을 한 장수였는가 하면, 김부식의 노련한 붓놀림으로 매우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상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바보에서 장수까지 가장 극적인 생애를 살다 간 온달에게 많은 사람의 애정과 관심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수사의 전모를 살펴보자. 고구려 평원왕~영양왕 때의 장군으로 북주(北周)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아단성(阿旦城)에서 전사했다. 고구려 제25대 평강왕(재위 559∼590)은 평원왕또는 평국왕이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양원왕의 큰아들로 태어나 왕 13년(557)에 태자가 되고..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재위기간(1608∼1623) 동안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옥사를 일으켰고, 외교에서는 실리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런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축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 묘호조차 갖지 못한 군주가 되었다. 조선왕조 제1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까지이다. 이름은 이혼(李琿), 본관은 전주,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 씨(恭嬪金氏)이며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4월, 20만 일본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른바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7년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은 전투 초반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의주로 몽진하는 등 패색이 짙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