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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은 조선의 중기에 관해 써 보았습니다
오늘은 조선의 역사 중 흥선대원군이 집권을 하기 전까지의
조선 역사 후기를 포스팅 해 보겠습니다
붕당 정치의 변질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동인이 아닌 서인들이다.
서인들의 정치력은 근본적으로 지주제에 토대하였고, 그들의
개혁안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서인 정권은 기득권 세력의 움직임에 미봉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남인 측의 도전으로 서인
정권의 위기가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남인은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꾸준히 진출하였다. 윤선도는 현종의
스승이지만 남인 계열로서, 야당적 입장에 오랫동안
머물러온 남인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남인들은 서인 정권이 추구한 북벌 운동의 무모함과
개혁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예송(禮訟)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예론을 중심으로 한 붕당 사이의 대립은 예(禮)의 문제가 당시에는
사회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으므로 붕당정치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더구나 예송이 정체(政體) 문제와 관련을
가지면서 두 정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자아냈다.
예송은 인선왕후와 효종의 국상(國喪)에서 자의 왕대비의
복제(服制) 문제를 계기로 일어났다.
효종은 차자로서 왕통을 이어받았는데 효종을 적통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시비였다.
현종 원년인 1659년 1차 논쟁에서 서인의 주장이 받아
들여졌지만 1674년 2차 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정치적 지위가 신장하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에 의하여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양상은 크게
달라져 갔다. 서인은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여
남인의 정치적 재기를 막았다. 이때 서인은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과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노론으로
분열되었으며. 두 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이로부터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견제와 균형, 공론에
토대한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있었다.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로 비화하는 등 붕당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상대방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하여졌다.
이때 숙종은 환국(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관리)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을 자주 교체하였다.
숙종의 잦은 환국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과 노론이
대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경종 때에는 왕세자가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소론과 노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런 정치적 동향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나는데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정치적 쟁점도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 갔는데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향촌 사회는 신분제와 지주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탕평 정치의 전개
영조가 즉위한 당시, 노론을 몰아내고 다시 집권하려는
소론과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으로 나뉘면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조는 이러한 당파 싸움에 넌더리를 낸 나머지 조정을
어지럽히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소론과 노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기도 한다.
여기서 탕평이란 정치를 할 때 편과 당을 좇지 않고 지극히
중립적이고 신념에 따라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후 영조의 국정 운영의 가장 큰 원칙은 탕평책이 되었다.
영조는 소론을 한 사람 기용하면 상대 자리에는 노론을
기용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실시하는 것으로
탕평책을 실천했다. 탕평 정치는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벽파와 시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탕평 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정조가 더욱 발전시킨 탕평 정치의 주요 조치를 살펴보면
대신 한 사람이 정승을 고발하거나 풍문에 따라
탄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조가 이렇게 한 이유는 당시
대간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수뇌를 공격하는 파당의 전통적인
관행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정조는 붕당 조성의
주요 통로였던 인사권에 임금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조정에서
당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정승과 임금이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나갔다. 그리고 대역죄와 연좌법의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대역죄를 빙자하여 다수의 상대 당 인물을
일시에 탄핵하는 관행을 철폐시켰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아예 대신들이 당파를
지목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파당 의식 자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를 육성하는데 그것이 바로
규장각이다. 정조는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재교육시키고 양성하려 하였다.
특히 정조는 신진 인물이나 중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秒稽文臣制)를 시행하였다.
세도 정치의 전개와 홍경래의 난
정조가 1800년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자 그의 장인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년 동안 계속되는데 순조 3대에 걸친 세도정치이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왕권이 강화되자 일시적으로 암흑기를
가졌던 당쟁과 일당독재 체제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임금들이
잇달아 즉위함에 따라 절대적인 왕권이 사라지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형태로 변질하였다.
이는 오랫동안 조선의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선조 이후 완전히 붕괴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동김씨 세력은 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다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 집안에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력을 떨쳤다. 세도정치는 60년간 이어졌는데
이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 갔다.
백성과 왕족들은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략하고 말았다. 세도 정치는 그야말로 기형적인 정치 형태이다.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
군정(軍政) 등 이른바 삼정(三政) 문란이 그 대표적이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계속 야기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이 가장 대표적인 민란이다.
홍경래는 몰락한 양반인데 홍경래의 지도하에 수많은 농민과
영세농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한때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민란은 계속 이어지며 확대
되었다. 세도정치는 그런데도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자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에는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는 콜레라(감염되면 설사와
탈수 증세를 보인다.한국에서는 괴질로 불렸다)의 만연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콜레라의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 전래하였으나 심한
박해당하였다.
오늘은 조선의 역사 후기 중 흥선대원군의 집권기 전까지를
포스팅하였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셨다면 공감 부탁합니다
2023.06.10 - [역사학] - 조선의 역사-중기
2023.06.08 - [역사학] - 조선의 역사 전기
http://blog.naver.com/jaeyunea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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