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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찬란했던 조선 왕조 시대 중 조선 전기에 관해 포스팅 해 보겠습니다.
조선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를 다시 둘로 나눈다면 전기와 중기로 보고 전기-중기-후기로
보기도 하며 전기, 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임진왜란이며 전기, 중기, 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중종반정이며
중기와 후기는 임진왜란 또는 병자호란이다.
조선의 개국과 왕자의 난
고려는 14세기 말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려의 내부는 기존 귀족 세력인 권문세족과 그에 반발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하여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연출하였고 외부적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 그리고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지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스러움으로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이 무렵 고려의 북방은 이성계가 이민족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며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시기였다.
이성계가 중앙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을 무렵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 안으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에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는데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에게 회군을 요청하였으나 회군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1388년 음력 5월 20일 군사를 수도로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를 역사에서는
위화도 회군이라 칭한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시킨다. 우왕을 폐위한 후
창왕을 왕위에 올림과 동시에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과 손잡고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는데
과전법과 같은 전제 개혁 등이 있다. 이듬해에는 창왕을 다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를 폐가입진이라 하는데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므로 폐하고 진짜 고려 왕 씨를
왕으로 삼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전법을 공포하고 사전 개혁을 단행하였다.
전제 개혁으로 인해 이성계, 조준, 정도전 등은 막대한 과전을 받게 되었으나 권문세족들은 농장을 몰수당함으로써
경제적 토대가 붕괴하는 일을 겪는다. 한편 공전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힘이 되는데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게 하는 데 힘을 보탠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에서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도 장악하였는데 1392년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는데 태조가 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의 이름을 고치고(1393년 음력 2월 15일) 당시 남경이라 불리던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1394년 음력 1월에 수도를 천도하였다. 고려의 법제를 개혁하여 나라의 기틀을 닦기도 하였다.
태조는 고려 때에 큰 폐단이 되었던 불교 대신에 유교를 존중하였는데 이를 교육과 정치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는데
이에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천대받고, 유교는 아주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한편 명나라에는 사대 정책을 써서 국호를 고칠 때도 명의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었는데 서로 사신의 내왕이
잦았으며, 이를 통하여 회사, 조공 형식의 각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하여지기도 하였는데, 이 두 정책은 조선의
근본정책으로 계속 계승이 되었다.
태조는 막내 왕자인 의안대군(8번째 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공이 컸던 정안대군 이방원은(5번째 왕자)
이에 불만을 품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1398년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키는데 방석 왕세자와
7번째 왕자 무한대군 방법,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살해한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위인 2번째 왕자 영암대군 이 방과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해 음력 9월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이 방과에게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조선 2대 왕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야심을 품은 또 다른 왕자가 있었으니, 회안대군 발간이다.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웠으나 큰 보상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발포와 공모하고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그러나 당시 이방원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이방원의 군사와 개경에서 맞붙어 패하여 발간은 유배되고 발포는 처형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정안 대군
이방원을 왕세자로 삼고 음력 11월에 이방원이 등극하여 조선 3대 왕 태종이 되었다.
제도의 정비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기도 한다.
태종 이방원은 호구 조사와 양전 사업을 통해, 호적 제도와 조세 제도를 개혁하기도 한다. 그리고 의정부를 설치하며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기도 한다. 공신 세력과 왕실 외척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하며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한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왕이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군사, 학문,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 또한 안정되어 갔다. 이 시기에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한 것이 주자학이다. 또한 고려 말에 들여온
면화가 보급되어 갔다. 북방 지역인 4군과 6진을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장했으며, 조선
기술 발전과 화포 제작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집현전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정책 연구 기관으로
학문을 진흥시키는 기관이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이라 칭송받는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향약집성방(의서 편찬)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세종대왕의 맏아들인 문종이 짧은 치세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단종은 병권을 장악한 세종대왕의 차남이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빼앗겼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대왕이 채택한 의정부 서 사제를 폐지한다. 그리고 조부인 태종이 주창한 육조 직계 지를
부활시켜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던 집현전을 폐지하고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한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국조보감, 동국통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로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고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며,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종대왕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었던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하였다.
성종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며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이다. 폭군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사림파는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다. 사림파는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는다. 이때부터 붕당정치 즉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며 사림의
붕당정치가 시작된다.
이로써 조선의 역사 중 전기에 관해 글을 써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선 중기에 관해 포스팅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http://blog.naver.com/jaeyunea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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