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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중에서 조선중기에 관해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경제 체제의 결함과 해이

 

명종 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며 붕당정치가 시작되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신진 사류의 불만이 쌓이게 되는데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제도의 문란에 따른 훈구파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 배분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불만이 쌓이게 되며

이는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신진 사류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화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선조 때에는 서류들을 등용하기 시작하니 이는 사류 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라고 봐야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쟁이라

하여 사로들 사이에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된다.

(현대 시대의 당쟁이 이때부터 시작이 된 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국가로부터 양반 관리들은 우선 과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습

되어 갔다. 양반 관리들은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해 나갔는데 매입 등이 그 방법이다.

또한 양반 관리들은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을 침식하여 갔다. 양반 관리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의

확대를 가져오는데 직전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한 농민이 증가하며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 생겨나는데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하여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이나 진상 때문에 농민들의 고통이 커졌다. 더구나 농민들의 고통을 이용한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져 가는데 이이(李理)는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채용되지 않았다. 농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불난 집에 부채질을 정부가 하게 되는데

환곡 제도에 의한 농민을 상대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는데 의창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자 상평창에서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 정책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하여

갔으며 농민들의 고통만 늘어나게 되었다. 많은 농민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하게 되었으며 또한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이 된 관계로 농촌은 황폐해 갔으며, 전국 각지에서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도적이 임꺽정이다.

 

정치 구도의 변화와 붕당의 징후

 

중종반정-1506년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박원종 등이 일으킨 반정이며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여 중종반정이라 부른다. 초반 중종의 왕권은 미약하였다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데 주력하며 그 방책으로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유교적 개혁정치를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 정책으로 

인하여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조광조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차츰 싫증을 내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로 인하여 훈구파의 위기감이 극에 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신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하면서 다수의 공신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중종은 홍경주 계획해서 조광조와 다수의 사람을

1519년 실각시키기에 이르고 결국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연이은 사건으로 인하여 정국이 편할 날이 없었는데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반정 공신과 외척 세력 간의 정권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명종은 1545년 조선 13대 왕으로 등극하고 어머니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당시 옥좌를 두고 

파평 윤씨 일가의 당쟁이 극에 달했는데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륜과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륜이 세자와 

경원대군을 내세웠다. 명종은 인종이 보위에 옳은지 1년이 채 안 되어 승하를 한 후 왕위에 올랐는데 보위에 오른 후

대륜을 몰아내는 사건 즉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온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그에 연루된 인명까지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 후부터 문정왕후의 극단 정치가 시작이 되는데 윤원형의 세력이 조정 내에서 활개를 쳤기 때문이다.

당시 수많은 인명을 사사함으로 인해 큰 질책을 느꼈던 문정왕후는 종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유교숭배 배불을

중심으로 한 유교 사회에서 조선 최초로 불교의 승려인 보우를 판섭니까 양 종사도 대선사라는 정2품 직책에 앉혀 

불교 중흥에도 힘썼다. 또한 도첩제를 실행해 승려를 뽑게 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문정왕후는 이때 수많은 질책과 비난을

받았는데 그런데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1553년 섭정 시대는 종결을 내렸으나 이미 정세는 문정왕후의 세력에

기울어 있었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정치간섭으로 인하여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자기 의사대로 친정을 할 수 없었다.

명종은 수많은 선비가 죽어 명종의 주변에는 모두 소윤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어서 신하 앞에서도 왕으로서의

권한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약 12년간 이런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세월이 흐르듯 문정왕후도 쇠약해지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1565년 죽게 되는데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정치는 안정을 되찾게 된다. 명종은 정경부인 정난정과 윤원형의

관직과 직위를 삭탈함으로써 왕권을 펼칠 기회가 왔으나 이미 기울던 조정은 부패한 상태였다. 또한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에 명종도 생을 달리하게 된다. 이 시기로 인하여 조선의 정치 구도는 흐트러진 것은 사실이나 전적으로

사림들의 시각에서 비친 관점이며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을 완전히 수용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1552년 선조는 왕위에 오르며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게 된다. 이는 선조가 사림을 통하여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코자 함이다. 선조는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유학자를 

복권함과 함께 훈구파 대신인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직을 초탈하고 상훈하여 민심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후에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으로 사림이 분리되며 붕당이 형성되자

선조는 한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따라 정국이 단번에 교체되는 일이 잦아졌다.



사림들은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선조 때에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니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되었다. 그럼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과 김효원 양파의 전량 직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양파의 대립 과정으로 인하여 동인과 서인이

생겨났으니 천리안을 가진 이준경은 일찌감치 붕당의 징후가 보인다고 했었는데 그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외적의 침입과 왕의 무능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내부 갈등을 통합해야 할 필요를 느낀 후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다.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조선군은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였다. 심지어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 분 수군을 대파하여 일본 육군의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게 하고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활약하였으며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일본

왜적을 7년 만에 조선에서 몰아냈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군사들을 매일 훈련해 국방을 강화 하였고

성과와 무기를 수리하였으며, 전쟁 기간에 불에 탄

사고를 재정비하고 호적을 다시 정비하였다.

또 실리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과 서인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인조반정)

인조는 사림파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후 명나라와 다시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

(1636년)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였다. 인조가 이끄는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붕당이 심해지고 전란이 계속되는

이 시대에도 의학자 허준은 을 세상에 내놓았다.

동의보감은 1597년과 1608년에 발간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동 의학을 기준으로 하여, 대부분 의학서를 참고하고 만들었으며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는 의학서적이다.

한편 조선은 점점 망해가는데 이유는 조선 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 대립에 곁들여 7년간의 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대대적인 파괴 행위로 그 피해는 막심하여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니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게 된다.

파탄에 직면한 사회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세제(稅制)와

병제(兵制) 개편이 불가피했으며, 또한 한편으로는 백성들에 대한

부당한 과세가 성행하였는데 (조선시대나 지금 현대 시대나 세금을

더 거둬들이기 위해서 백성들만 쥐어짜는 행태는 똑같다) 가난에

쪼들리는 백성들을 더욱 못살게 굴어 농촌사회는 극도로 황폐하게

되었으며 정부에 대한 반항 의식이 조장되며 조선은 점점 망해 간다.

 

북벌론과 북학론의 대두

병자호란이 종식되자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고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나라를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나라를 정벌하여 문화대국인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인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씻자"며 외친 임금이 있었으니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청나라를 혐오하여 강력히 배척한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대량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그러나 북벌론은 1659년 출병 직전 효종이 서거하자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효종 서거 후에도 남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지만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친다.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후에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 자신들이 자초한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인들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장기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하였지만,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는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 고립을 초래해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했다.

한편 당시 청나라는 중국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으며

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배우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오늘은 조선 중기의 역사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셨다면 공감 부탁드립니다!

2023.06.08 - [역사학] - 조선의 역사 전기

.http://blog.naver.com/jaeyunea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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