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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사에 최초의 "4강 신화"를 쓰고 "붉은 악마"의 기원을 만들어낸 박종환 전 국가대표 감독이 10월 7일 밤 향년

85살로 타계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의 레전드라 불리는 인물로 선수 시절에는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그라운드의 야생마"

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에 대하여 오늘은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유족은 고인이 약 1년 전부터 인지 능력이 급격히 저하돼 요양병원 생활을 하던 중 코로나 

진단을 받았고 패혈증 증세를 보인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습니다.

 

박종환 감독의 선수 이력

박종환 감독은 1938년 2월 9일 황해도 옹진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춘천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석탄공사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그는 1960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청소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우승했고, 은퇴 후에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국제심판으로 활동했습니다.

 

춘천고등학교를 3년간 다녔으나 대학 드래프트에 뽑히지 못해 1년 더 다녔는데, 이때 청소년 대표팀에 뽑히면서 경희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습니다. 이후 경희대를 졸업한 후 석탄공사 실업팀에서 잠시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선수 시절 박종환 감독은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그라운드의 야생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거친 태클과 투지 넘치는 돌파가 특징이었다고 합니다.

선수 경력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박종환 감독은 지도자로서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U-20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아 청소년 대표팀을 4강에 올리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후 성남 FC의 창단 감독을 맡아 정규리그 3연패를 이루는 등 명 감독으로 이름을 높였습니다

박종환 감독의 선수 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960년 춘천고등학교 입학
1963년 춘천고등학교 졸업
1964년 경희대학교 체육학과 입학
1968년 경희대학교 졸업
1969년 서울은행 축구단 입단
1971년 석탄공사 축구단 입단
1973년 석탄공사 축구단 은퇴

 

박종환 감독의 대표적인 업적

 

박종환 감독의 대표적인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U-19 대표팀 4강 진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일화 천마 감독으로 K리그 3연패 달성      
-1995년 AFC 올해의 감독 수상                                                        
-2001년 한국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 역임                                     
특히,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의 4강 진출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메이저 대회 4강 진출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박종환 감독은 "벌떼축구"라는 독특한 전술을 앞세워 팀을 이끌며, 세계 축구 강호들을 상대로 선전했습니다. 이 대회의 활약으로 박종환 감독은 대한민국 축구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프로 감독으로서는 1989년 창단한 일화 천마의 감독을 맡아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연패를 달성하며 한국 축구의 새로운 강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1995년에는 AFC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며 한국 축구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여자 축구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2001년 한국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한민국 여자 축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특히, 2003년 FIFA 여자 월드컵에 참가하는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팀의 8강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박종환 감독은 대한민국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축구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박종환 감독과 코메디언 이주일의 60년 우정

 

박종환 감독과 코메디언 이주일은 춘천고등학교 동창생으로, 1960년대부터 평생을 함께 해 온 막역한 사이입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세 살 나지만, 박 감독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1년 더 다니면서 같은 학년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부터 서로를 챙기는 사이였는데 박 감독은 이주일이 축구 선수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이주일이 코미디언으로 진로를 바꾸자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고 합니다. 박 감독은 이주일이 무명 시절에도 그의 재능을 믿고 격려해 주었으며, 이주일이 스타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박 감독과 이주일은 1983년에는 함께 모교인 춘천고 축구부를 부활시키기 위한 연예인 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이 대회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모교 축구부의 부활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박 감독은 이주일이 2017년 3월 20일 별세하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박 감독은 "주일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며 "그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 감독과 이주일의 우정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의 우정으로 손꼽힙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며, 평생을 함께 해 온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박 감독과 이주일의 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 감독은 이주일이 무명 시절, 그의 공연을 보러 다니며 격려해 주었는데 이주일이 한 공연에서 망신을 당하자, 박 감독은 그의 곁에 앉아 "괜찮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위로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박 감독은 이주일이 스타로 성장한 후에도 그의 재능을 믿고 지지해 주었으며 이주일이 배우로 활동하고 싶어 하자, 박 감독은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이주일은 배우로서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박 감독과 이주일은 1983년 함께 모교인 춘천고 축구부를 부활시키기 위한 연예인 축구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회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모교 축구부의 부활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박 감독과 이주일의 우정은 한국 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서로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과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연세가 있으시다면 벌떼축구 박종환 감독님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이 있을 겁니다.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선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찌 할수가 없나 봅니다고생하셨습니다. 좋은 곳에서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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