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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재위 391∼412)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갖추어준 바탕에서 대정복 전쟁을 수행하였고 국경 북쪽으로는 연 나라, 남쪽으로는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며 자신의 영토를 넓혔다. 그리고 숙신과 동부여마저 광개토대왕의 위력 앞에 떨게 하였다. 광개토대왕이 이룬 최강 고구려는 아들 장수왕에 이르러 절정을 치닫는다. 그 같은 고구려의 화려한 면면은 광개토대왕의 비문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여실히 전해진다.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광개토대왕이 이룩한 이 공적은
서양의 정복왕 알렉산더와도 비견되는 우리 민족의 영광이고 자랑이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광개토왕릉비문’에서)
왕이라고 다 같은 왕이 아닌것이다. 왕 중의 왕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그 왕 중의 왕이 바로 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이다. 공적만큼이나 광개토대왕의 생애를 적은 비석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어쩌면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에 남은 내용보다도 더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 글도 웅혼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지금 중국 땅 집안(集安)에 서 있는 ‘광개토왕릉비’이다. 그래서 그를 비석으로 남은 왕이라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늘날 학자들은 아마도 5세기 무렵 고구려 당대의 최고 문장가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지은 문장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비는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졌는데 광개토대왕이 죽고 2년 뒤의 일이었다. 비석의 높이는 6.39미터, 글자는 모두 1,775자 정도 되는데, 이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찍이 역사학자 민영규 선생은, “무서운 문장력이다. 어느 한 구절, 전후 사방으로 치밀하게 그 역학관계가 계산되지 않은 구석이 없다.”라고 칭송하였다.
그 배경에는 고구려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점,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회분위기, 고양된 역사의식이 깔려 있으리라는 점도 첨부된다. 사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문장가에게 초안을 보여 윤문 하였으리라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이다. 더욱 나아가 비문의 글씨에 매료되는 사람도 있다. 김응현 선생(서예가)은 이 비문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로운 자기 서체를 개발했다. 흔히 ‘호태왕비체’라 부른다.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을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왕의 자리에 올라, 그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을 뿐만 아니라,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고, 비문은 한껏 대왕을 칭송하고 있다(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광개토대왕)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며 안타까워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동명성왕 주몽의 탄생 담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비문을 지은 이가 주몽을 ‘천제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다 보면, 광개토대왕도 천제의 자손임에 결코 부족함이 없음을 강조하려 한 뜻을 곧장 알아차리게 된다. 아마도 이때까지의 후손 가운데 특히 그렇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이름은 담덕(談德),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완전한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또는 호태왕(好太王)으로 부르기도 한다.널리 알려졌듯이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다.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해는 374년이다(소수림왕 4년).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의 큰아버지로, 자타가 공인하듯 초기 고구려를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소수림왕은 아들이 없이 죽었다. 그러자 동생인 고국양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고국양왕 3년 곧 386년에 12세의 나이로 광개토대왕은 태자가 되었다. ‘나면서부터 허우대가 컸으며 뛰어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광개토대왕의 사적을 적고 있는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의 활약을 크게 두 방향에서 적었다. 하나는 백제와의 치열한 영토전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 후연(後燕)과의 분쟁이었다.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10개 성을 쳐서 빼앗고, 왕 4년까지 매년 백제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광개토대왕은 한반도의 한강 이남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늘렸다.
한편 즉위 9년 이후에는 후연과의 분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이때의 후연의 왕은 모용성(慕容盛)이었다. 처음에는 우세한 군사력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였으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즉위 11년 이후 전세를 가다듬고 착실한 공격 작전을 펴 점차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광개토대왕 즉위 14년, 모용성을 이어 후연의 왕이 된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는 성이 함락 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광개토대왕의 고구려는 끝내 성을 내주지 않고 지켜냈다. 이 전쟁 이후 모용희는 백성의 신임을 잃고 살해되어 후연이 망했으며, 뒤를 이어 모용운(慕容雲)이 북연(北燕)을 세우자 비로소 화친의 관계를 맺었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이끈 고구려의 끈질긴 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18년(408년)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이 태자 거련이 나중에 장수왕이 되는 바로 그 태자 거련이다. 사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광개토대왕의 시대를 이렇게만 정리해 놓고 보면 다소 심심하고 밋밋하다. 대국의 건설자 광개토대왕이 겨우 백제와 후연과만 싸우다 일생을 마쳤단 말일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광개토왕릉비로 돌아가야 한다.
영락대왕이라는 이름은 광개토대왕이 살아서 쓴 것인데 이를 알려주는 것도 비석에서이다. 그러면서 이 비석의 첫 부분에는 그야말로 매우 감격적으로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정리해 주었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왕의 은택과 위엄, 부강하고 풍족한 나라를 이렇게 간명하게 쓰기란 정말 쉽지 않다. 더욱이 이때는 서기 5세기 초로 한문의 쓰임이 그다지 자유롭거나 널리 퍼져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문장에서 마지막의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의 원문은 ‘안가기국(晏駕棄國)’이다. 여기서 안가(晏駕)를 직역하면 ‘임금의 수레가 늦는다’이다. 이는 왕의 죽음에 붙이는 무척 높은 수준의 말 꾸밈이다. 이런 문장구사력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당대 고구려의 문명이 국력의 신장과 함께 이렇게 올라와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음의 짧은 문장이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에 왜(일본)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 6년 곧 병신년에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
이를 원문으로 보면 모두 44자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3자가 지워져 있다. ‘백잔□□□라(百殘□□□羅)’라는 부분이다. 세 글자를 복원하여 번역하면 위의 인용에서 괄호 친 부분이 된다. 백 잔(百殘)은 백제를 낮추어 부른 말이고, 마지막 라(羅)는 그 앞에 신(新)을 넣어 신라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 두 자는 연(連)과 침(侵)이다. 그래서 ‘연합하여 신라를 쳤다’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 글자를 처음으로 채워 넣은 이는 정인보 선생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두고 무엇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는 것일까?.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은, “신묘년에 왜 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쳐부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는 대목을 세 글자가 없는 상태에서 번역하였는데, “신묘년에 왜 나라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치고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곧 이 무렵 일본이 김해 지역을 식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려는 일본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서 지워진 세 글자를 제멋대로 ‘백제와 신라’라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는법. 사실은 이렇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자신이 즉위하던 해인 신묘년(391년)에 왜 나라와의 해상전에서 이겼다. 그런데 왜 나라와 가까운 백제가 그들과 연합하여 신라를 쳤다. 그러자 광개토대왕 6년(병신년, 396)에 신라를 돕기 위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했다. 이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그야말로 고구려와 일본 그리고 백제와 신라 사이의 숨 막히는 외교 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사라진 세 글자를 놓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는데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잘 훈련된 군인을 보내 비문에서 이 세 글자를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으로만 떠도는 이야기이다. 소문이 어찌됐건 정인보 선생 같은 눈 밝은 학자에 의해 본디 글자가 복원되어, 지금 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론이 없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인보 선생같은 분이 안 계셨더라면 역사는 왜곡되었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가 전해주는 영락대왕의 빛나는 업적은 이뿐만이 아닌데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가 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며 영토를 넓혀 간 사실은 이미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 나왔다. 비문에서도 이 같은 사실은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데, 이 밖에도 백제와 왜 나라가 연합하여 신라를 괴롭히고, 이에 대해 끊임없이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일이 적잖이 기록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396년의 싸움 외에, 바로 3년 뒤, 신라의 왕은(내물왕) 고구려에 긴급히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기고,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왕의 계획을 돌아가 알리게 하였다. 다음 해, 곧 경자년(400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신라에 이르자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구려군을 보자 멀리 물러났다.”라고 비문에서는 적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기록이다.
숙신과 동부여를 친 일도 역시 대왕비에서만 나오는 사적이다. “영락 8년, 곧 무술년(398년)에 숙신을 쳐서 항복을 받고,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대목은 숙신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또한, “영락 20년, 곧 경술년(410년)이었다.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부여성에 이르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하였다.”는 대목은 동부여에 대해 알려주는 기록이다.
광개토대왕은 왜 자신의 이름을 영락(永樂)이라 지었을까?? 비문의 마지막에는 이런 일화가 나오고 있어, 그 까닭을 짐작하게 해 준다. 그때까지 고구려에서는 왕릉에 비석을 세우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섞갈릴 수밖에 없었겠다. 벌써 열여덟 분의 왕릉(광개토대왕은 19대왕)이 자리 잡을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은 선조 왕들을 위해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지키는 이를 기록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규정을 만들었다.
“묘를 지키는 이는 이제부터 서로 팔아 넘겨서는 안 되고, 부유한 이라 할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한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묘를 지키도록 하라.”
고구려의 열아홉 번째 왕으로, 영토는 넓어질 만큼 넓어졌고 나라의 기강도 세워졌으니 이제 중요한 것은 영원히 이 영화를 누리고 지키는 일이다(모든 왕이 꿈꾸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상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또한 조상님께 빌면서 이 나라를 대대로 크고 부강하게 이어나가자는 뜻이 광개토대왕의 이름 ‘영락’에는 들어있지 않았을까. 영락대왕 그는 비록 꽃다운 나이 서른아홉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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